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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대한민국의 교육열 '무즙파동'

89년생몽실이 2022. 12. 6.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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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 년 전 중학교에 가려면 입학시험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에 시험이 없지만 50여 년 전만 해도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가려면 입학시험이 필요했고 특히나 명문 중학교에 입학 하기 위한 경쟁률은 지금의 수능보다 더 치열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중학교 입시에서 터진 하나의 사건 때문에 중학교 입학 시험이 폐지되었습니다.


무즙 파동

무즙 파동은 1964년 12월 7일에 치러진 1965년도 서울특별시 지역 전기(前期) 중학교 입시 자연 과목 18번 문제와 관련하여 복수 정답을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던 사건입니다.

 

지금은 중학교 입시 제도가 없지만 50년 전이었던 1960년대에는 중학교 입시 제도가 있었습니다. 학부모들과 학생들은 명문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전쟁을 방불케 하는 경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자연 과목 입시 문제 하나로 전국이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문제의 자연과목 18번 문제

문제가 됐던 자연과목 18번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음은 엿을 만드는 순서를 차례대로 적어 놓은 것이다.
1. 찹쌀 1kg가량을 물에 담갔다가
2. 이것을 쪄서 밥을 만든다
3. 이 밥에 물 3L와 엿기름 160g을 넣고 잘 섞은 다음에 섭씨 60도의 온도로 5~6시간 둔다.
3. 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

서울시 출제위원회에서는 정답을 보기의 1번인 '디아스타제'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보기의 2번인 '무즙'을 답이라고 선택한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침과 무즙에도 디아스타제가 들어 있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무즙도 답이라고 주장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됐습니다. 일부 학부모들은 무즙으로도 엿을 고을 수 있음을 보여서 무즙도 정답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무즙이 답이고 디아스타제가 오답으로 봐야 합니다. 

문제에서는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을 물어보고 있습니다. 즉 재료를 물어본 것입니다. 엿을 만드는데 엿기름을 대신할 '재료'를 물어봤기 때문에 엿기름의 어떤 성분을 물어보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엿기름의 성분 중 하나였던 디아스타제가 아닌 엿기름을 대체할 수 있는 무즙을 정답으로 봐야 합니다. 게다가 디아스타제를 엿기름이나 무즙처럼 하나의 재료로 볼 수 있는지도 애매한 부분입니다. 만약 디아스타제를 정답으로 두고 싶었다면 문제를 ' 엿기름의 어떤 성분 때문에 당화 작용이 일으켜 엿이 되었는가?'라고 문제를 내는 게 더 정확합니다. 애초에 문제 자체가 잘못된 문제입니다.

 

 

능숙하지 못한 대응이 부른 불길

사건이 파동으로까지 커진 것은 당시 교육 당국의 능숙하지 못한 대응이 오히려 사건을 더욱더 복잡하게 만들고 크게 만들었습니다. 시험 다음날인 12월 8일에 교육 당국은 이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학부모의 반발이 가라앉지 않자 그다음 날인 12월 9일에는 해당 문제를 무효화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번에는 원래 정답을 선택했던 학생들의 학부모가 반발하자 다시 원래대로 보기 1번을 정답으로 인정한다고 발표하여 능숙하지 못한 대처로 양측 학부모들은 물론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을 야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시 교육감이었던 김원규 교육감은 '만약 무즙으로 엿이 된다면 자연 18번 때문에 떨어진 수험생은 구제하겠다.'라고 언약했다고 주장하는 학부모들이 직접 솥에 엿을 만들어 가져와 항의를 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법정 공방과 결말

결국 중학교 입시 문제는 법정 공방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당시 1점 차이로 명문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게 된 약 40여 명이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해를 넘긴 1965년 3월 30일 서울 고등법원 특별부가 무즙도 정답으로 봐야 하며 이 문제로 인해 불합격된 학생들을 구제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에 당시 고육위원회는 추가 입학을 반대했고 그로 인하여 학부모들이 다시 시위를 벌여 판결이 5월 12일에 전입학 형식으로 약 38명의 학생들이 구제받아 등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사건 그 이후

법원의 판결과 시위를 통해 전입학 형식으로 구제를 받았던 그 틈을 타서 일부 부유층 및 사회지도층 자녀 21명이 부정입학을 시도했다가 발각되면서 당시 서울시 교육감, 문교부 차관 등이 사표를 내어 수습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대한민국의 교육열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줬던 하나의 사례로 기록됩니다. 이에 중학교 무시험 전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뒤를 이어 중학교 입시에 대한 문제가 계속해서 나오자 1968년부터 중학교 입시를 폐지했습니다. 

 

 


관련 기사는 동아일보 1965년 4월 6일 석간 7면 사회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https://www.donga.com/archive/news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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