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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천주교도 박해사건 '신해박해'

89년생몽실이 2022. 12. 7.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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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박해는 신해교난, 신해사옥, 진산 사건 등으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립니다.

 

 

얼마 전에 영화 '탄생'을 봤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흥미롭게 봤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에 어떻게 다른 종교가 뿌리를 내리고 탄생을 했는지 '김대건'이라는 인물을 통해 잘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종교 영화지만 어떻게 보면 다큐를 보는 듯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오늘 이야기에 앞서서 영화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오늘 이야기 또한 종교에 관한 이야기라서 그렇습니다. 오늘 소개 해드리는 사건은 조선의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으로 소개되고 있는 '신해박해(辛亥迫害)'입니다.


신해박해(辛亥迫害)

1791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정조 15년의 신해년에 조선 최초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 사건입니다. 신해교난(辛亥敎難) 또는 신해사옥(辛亥邪獄), 진산 사건(珍山事件)등으로 불리는 사건입니다.

 

진산 사건이라는 이름처럼 전라도 진산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진산에 사는 한 선비로 인해 발생했습니다. 선비 윤지충은 부유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정약용과는 내종사촌 관계였습니다. 그는 정약용의 권유로 중국에 다녀올 수 있었는데 중국에서 천주교인의 성인식이라 할 수 있는 견진성사를 받고 왔습니다.

 

중국에서 돌아 온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종교적인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서 전통의 장례가 아닌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른 후 제사를 폐하였습니다. 이는 그 당시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파장이 일었고, 이 일은 당쟁으로까지 번지면서 윤지충은 사회를 문란하게 했다는 죄명 하에 그에게 동조한 외사촌 권상연까지 함께 참수를 했습니다.

 

 

조선의 천주교

일부 사극 드라마에서 봐왔던 천주교의 모습은 '천주학 죄인' 또는 '천주학 쟁이'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핍박 받는 모습이 대부분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초기에는 조선의 사대부들이 탐구할 정도로 성행을 했습니다. 조선에 천주교가 전해진 것은 중국을 통해서입니다. 처음에는 종교가 아닌 학문으로 조선에 전해졌습니다. 서양의 문물이고 학문이기에 조선의 사대부가들은 천주학을 탐구 했고 그러다가 종교로 받아들여지면서 18세기 말에 크게 성장했습니다.  

 

천주학은 성리학의 한계성을 느끼고 새로운 진리를 추구하고자 했던 일부 진보적인 사상가와 관직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 그리고 부정부패와 무기력한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정조 시절에는 천주교는 곧 소멸될 사교(邪敎)라 하여 묵인을 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천주교는 점점 커졌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그 당시 현지 적응주의 선교 방식도 천주교의 교세 확장에 한몫을 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가 조선의 근간을 흔들 수는 없었습니다. 천주교는 철저하게 조선의 이념과 체제에 반대에 있었습니다. 평등사상에 입각하여 사회 근간을 이루고 있는 신분제 철폐나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식을 거부하고 지배체제에 도전하는 위협적인 사상이라 여겨져 1785년 정조는 이를 사교(邪敎)라 규정하고 금령을 내렸습니다.

 

게다가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제사가 조상을 공경하는 행위가 아닌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라 선언하면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 하였는데 그로 인해 중국에서 조선에서도 천주교는 박해와 고통을 겪게 됐습니다. 

 

 

종교에서 당쟁 그리고 결말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로 윤지충과 권상연의 행동은 사형에 처할 수 있을 정도의 중죄였습니다. 천주교식 장례를 치른 것도 모자라서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 당에 묻는 등 종친들의 눈에는 천인공노할 짓을 벌인 것으로 보였고 일가는 두 사람을 고발하였습니다. 

 

정조의 입장에서는 이를 더는 확대 시키고 싶지 않았고 마무리를 짓고 싶었습니다. 천주교에 대해 묵인을 했던 것도 자신의 측근 중에서도 천주교를 가까이하는 이들이 있었고 학문을 탐구하는 많은 사대부들이 천주교를 탐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조의 생각하고는 다르게 조정은 이 사건을 두고 10년의 처절한 당쟁으로 번졌습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당시 남인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었고 이 사건으로 하나로 똘똘 뭉쳐서 서인을 견제해도 모자른 때에 천주교 신봉을 묵인하는 신서파(信西派)와 천주교를 탄압하는 공서파(攻西派)로 나눠어져서 대립을 했습니다. 

 

조정의 신료들의 주청에 의하여 정조는 두 사람의 체포를 명령하였고 피해 있던 두 사람은 윤지충의 숙부가 감금 됐다는 소식에 관아에 자수를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천주교를 버리라는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고 결국에는 전주의 전라 감영으로 이송됐습니다.

 

윤지충은 자신은 천주교를 신봉하며 양반의 칭호가 박탈당하더라도 자신이 믿는 천주에게 죄를 짓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신주를 모시지 못하는 서민들도 있고 또 가난하기에 모든 제사를 치르지 못하는 양반들이 있는데 천주교를 신봉하는 것 또한 결코 국법을 어기는 것은 아니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항변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문초와 고문에도 끝까지 천주교를 버러지 않았습니다. 이에 전라 감영은 조정에 징계를 올렸고 조정에서는 두 사람에 대해 참수를 처해야 한다는 소리가 커졌습니다. 정조 15년 11월 8일에 이 당시 사건에 대해 판결을 내리면서 쓴 내용에 보면 자손이 조부모나 부모의 시신을 훼손하고 버리는 경우 참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윤지충과 권상연이 믿고 있던 천주교를 사특한 술수라 칭하며 흉악하고 패륜함이 이를 데 없어 사람의 도리를 완전히 끊어졌으니 참수를 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주청이 있었고 이에 정조는 윤허하였습니다.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1791년 12월 8일에 전주 남문 밖에서 차례로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이 당시 천주교를 믿었던 많은 양반들이 배교했습니다. 사교가 되어 금령이 되었고 천주교를 믿는다 하면 핍박을 받거나 유배 등에 보내져서 양반층이 많이 이탈했습니다. 그 빈자리를 중인 계층이 채웠으며 탄압에도 불구하고 1794년에는 무려 신도의 수가 4천 여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윤지충에서 천주교를 소개했던 정약용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으며 서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정약용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배교하면서 천주교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했으나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은 여전히 천주교의 교리를 따라 집안의 제사를 거부하였고 그로 인한 갈등으로 처자식을 데리고 이사를 가버리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천주교의 제사 거부는 천주교를 탄압하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명분이 되어 십분 활용이 되었습니다. 이후 천주교에 대한 핍박과 탄압이 가속화되었는데 1801년 신유박해도 있습니다. 이 사건은 순조 1년에 발생한 천주교 박해 사건으로 정치투쟁에서 신서파를 완전하게 제거하기 위해서 공서파가 탄압을 명분으로 일으킨 사건입니다. 이 당시에는 신해박해 때보다 탄압의 강도가 더 심해져서 서적을 불태우거나 유배를 보내는 게 아닌 거의 극형으로 처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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