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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크리스마스의 기적"흥남 철수 작전"

89년생몽실이 2022. 12. 14.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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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15일부터 12월 24일까지 실행된 대규모 철수작전

흥남 철수 작전에 대해 아십니까? 영화 '국제시장'을 보셨다면 아마 아실 수 있습니다. 영화 도입부 초반에 주인공 윤덕수가 아버지와 여동생과 생이별을 하게 되는 피난 장면이 바로 흥남 철수 작전의 장면입니다.


흥남 철수 작전: 크리스마스의 기적

1950년 12월 15일부터 12월 24일까지 열흘 동안 동부전선에 투입된 미군과 한국군이 흥남항에서 피난민과 함께 구출시킬 목적으로 실행된 대규모 철수 작전입니다. 당시 미국의 제10군단과 한국군의 제1군단이 함경남도 흥남에서 배편으로 철수를 진행했는데, 해당 지역에 살던 주민들도 피난을 내려오면서 수많은 난민과 이산가족이 생겨 났다. 이 당시 피난민만 해도 10만여 명에 이르렀는데 철수 작전이 크리스마스이브에 성공적으로 완료되어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불렸습니다.

 

 

왜 철수를 해야 했는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북한군의 배후를 차단한 뒤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였고 30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하여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미군 제10군단은 동부전선을 맡았고 추가로 배속받은 한국군 제1 군단으로 하여금 동해안을 따라 북진하였습니다. 10월 29일 미군은 압록강 유역인 혜산진과 두만강 유역까지 진출했고 북한의 임시수도였던 강계를 공격하기 위해서 장진호 방면으로 진격했습니다. 하지만 중국군이 개입을 하면서 전세는 뒤바뀌게 됐습니다.

 

1950년 겨울 한국의 강추위와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12월 이후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강계 공격을 위하여 진격했던 미군은 중국군 12만여 명이 남하는 것을 지연시키고자 장진호에서 전투를 12월 13일까지 치렀으며 중국군이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했습니다. 장진호에 일어난 전투에 있었던 미군 군단은  전멸될 위기를 겪으면서 유엔군 사령부는 1950년 12월 8일 흥남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것이 1.4 후퇴의 시작이 됐습니다.

 

그 당시 육로가 아닌 해로를 선택한 것은 함흥과 흥남 일대를 제외하고는 함경도의 다른 지역들은 모두 중국군의 지역이었습니다. 게다가 1950년 12월 9일 원산까지 중국군이 점령하면서 퇴로가 끊어져서 선택지는 해로 밖에 없었습니다.

 

 

화물 대신 피난민을 실은 메러디스 빅토리호

1950년 12월 15일부터 12월 24일까지 열흘에 걸쳐 193척의 선박을  타고 38선 이남 지역으로 철수를 했습니다. 이때 피난민 10만 여명도 함께 철수를 했는데 피난민도 함께 철수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김백일 제1군단장과 제10군단 소속의 민간인 고문관 현봉학이 미국 육군 제10단 군단 사령관인 에드워드 알몬드를 설득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1만 명이 넘는 피난민을 태웠던 메러디스 빅토리호입니다.  군수 물자를 운송하기 위해 투입 됐던 화물선인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2월 22일에 흥남항에 도착을 하였고 당시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10만여 명이 넘는 피난민이 운집해 있는 혼잡한 상태를 보았습니다. 미군 군함과 비행기는 철수작전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후방의 중국군에게 폭격을 가하였고 군함과 상선할 것 없이 동원될 수 있던 선박 193척은 사람들을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정원은 60명이었고 선장을 비롯한 선원 47명이 이미 타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원래는 13명만 더 태울 수 있는 상태였으나 이 혼잡한 상황에서 한 명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선장이었던 레너드 라루의 결단으로 배에 있던 화물을 모두 버렸습니다. 그리고 화물 대신 피난민들을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피난민들도 한 사람이라도 더 타기 위해서 들고 있던 짐들을 버렸고 그렇게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피난민 1만 4천 여명을 태우고 흥남항을 떠났습니다. 이후 2004년에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됐습니다.

 

한국교육방송공사  의 "EBS_건축물_구조물_0352" 은  CC BY  라이선스로 제공됩니다.

 

흥남철수작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경상남도 거제시의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 공원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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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을 본 사람들이라면 피난 후 주인공이 고모가 사는 부산 국제시장에 내리는 것을 봤을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흥남 철수 작전의 끝은 부산항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계획에는 부산항이 끝이 맞지만 피난민들을 태운 선박들은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피난민을 태운 선박들이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유엔군의 입항과 흥남에서 철수한 미군과 한국군으로 인해 입항이 거부됐습니다. 이에 피난민을 태운 선박들은 더 남쪽으로 향하여 거제도 장승포항에 닿아서야 피난민들이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흥남철수작전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거제시에 세워져 있는 이유입니다.

 

 

흥남 철수 작전 결과

흥남 철수 작전에서 미군 제10군단과 한국군 제1군단의 장병 100,000명과 차랑 17,000대, 피난민 약 100,000명과 350,00t의 군수품을 안전하게 동해상으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흥남항에서 마지막 배가 떠난 것은 12월 24일이며 마지막 배가 벗어나는 순간 흥남항이 폭파됐습니다.

 

흥남 철수 작전은 성공적인 철수 작전으로 알려져 있지만 국가 보훈처에서 2005년 발행한 '6·25 전쟁 미군 참전사'에서 배에 탑승한 피난민들은 약 10만여 명이고 타지 못한 피난민들의 숫자 역시 그와 비슷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남은 10만 여 명의 피난민은 선박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피난민으로 가장하여 방어진 내부로 들어와 파괴 및 스파이 활동을 하는 이들이 많았고 그렇다 보니 신원이 보장되지 않은 피난민은 믿을 수 없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이유로 철수 당시 방어진 내부의 피난민들은 최대한 구출하였으며 바깥에 있던 피난민들은 진입을 막았습니다. 철수 시 폭파로 인하여 붕괴되면 대량의 피해가 발생할 것이 우려됐기 때문입니다. 이후 흥남에 남아 있던 피난민 중에서 탈북에 성공한 피난민의 증언에 따르면 고향으로 돌아가도 반동분자로 탄압을 받고 행방불명되는 일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민간인 고문관이었던 한국 의사인 현봉학 박사는 2000년 4월 그리고 2013년 7월에 호국 인물로 지정되었고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은 2020년 9월에 전쟁 영웅으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 레너드 라루 또한 2020년 12월에 전쟁 영웅으로 선정됐습니다.

 

후일담으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에 방문하였고 미국 장진호 전투 기념비에서 헌화식을 가졌습니다. 이때 했던 기념사에서 흥남 철수 에피소드를 이야기했는데 흥남 철수 작전 당시 한 선박에 부모님이 타고 있었다고 언급을 했습니다. 또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이동 중에 5명의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때 항해사였던 로버트 러니가 아이들의 이름을 김치 1,2,3,4,5라고 붙여줬습니다.

 

2020년 9월에 전쟁 영웅으로 선정된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은 명장이라기 보다는 좋지 못한 지휘 능력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장진호 전투 때 미군이 큰 피해를 입은 것도 알몬드 장군의 실책이 컸으며 한국군의 오마치 고개 확보를 반대하여 철수하게끔 하여 현리 전투를 패전하게 만드는데 일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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