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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러시아 '데카브리스트 반란'

89년생몽실이 2022. 12. 13.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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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rist revolt(Восстание декабристов)

1825년 러시아 최초로 근대적인 혁명 사건입니다.


자유주의를 경험한 러시아의 젊은 장교들

데카브리스트는 1825년 12월 14일, 19세기 러시아 제국에서 귀족층이 스스로의 권리를 내려놓기를 시도한 운동으로 이후 러시아 개혁 운동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데카브리스트는 12월을 뜻하는 러시아어 '데카브리(декабрь)'에서 왔습니다.

 

12월에 일어난 일이라 12월혁명당원이라고도 합니다.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러시아 제국의 젊은 장교 출신의 귀족층이 주도하였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러시아 제국은 나폴레옹 군대와 치열하게 싸웠으며 그 끝에 승리를 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철수를 하자 러시아 제국의 군대는  파리까지 추격하여 전투를 벌였고 파리를 점령하게 됐습니다. 이때 러시아의 젊은 장교들은 파리가 속한 서유럽의 자유주의 사상과 정치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고 이는 데카브리스트가 발생되는데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들은 당시 러시아 제국과 근대화된 유럽의 정치제도를 비교하며 러시아의 정치 제도가 낡았다 생각했습니다. 이에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러시아제국의 전제적인 낡은 정치와 군주제도의 폐지를 내세우며 입헌정치의 실시를 목표로 모여들었습니다. 젊은 장교들은 지배층인 귀족들이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피지배층인 농노들이 들고일어나 결국 지배층을 몰락시킬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며 그전에 먼저 지배층이 개혁을 실행하기 합니다.

 

 

조직과 목표

1816년 데카브리스트의 핵심인물인 알렉산드르 무라비요프(Алекса́ндр Н. Муравьёв)를 비롯한 6명의 장교가 중심이 되어 비밀 조직인 '구제동맹(Союз спасения)'이 결성되었고 1819년에는 '복지동맹(Союз благоденствия)'으로 조직이 확대되었습니다. 이후 1821년에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북방결사(Северное общество)와 전면적인 공화제를 목표로 하는 남방결사(Южное общество) 그리고 전(全)슬라브의 연방제를 내세우는 통일슬라브 결사 등으로 분열되기도 하였으나 목표는 같았습니다. 바로 혁명입니다.

 

 

새 황제와 12월의 혁명

1825년 11월 러시아 제국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승하를 하자 후계자 문제로 정세가 혼란해진 틈을 타서 데카브리스트들은 12월 14일 새로운 황제인 니콜라이 1세의 선서식장인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원로원 광장에서 새로운 황제를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시도했습니다.

 

이들이 무장봉기를 시도한 배경에는 당시 승하한 알렉산드르 1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그로인하여 동생인 니콜라이 1세가 황위를 물려받기로 하였는데 이에 데카브리스트들은 알렉산드르 1세의 동생이자 니콜라이 1세의 형인 폴란드 총독 콘스탄틴 파블로비치가 황제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사실 계승 순위로 본다면 옹립 대상자였던 콘스탄틴 파블로비치가 계승 순위가 앞서는 것은 맞습니다. 그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군인으로 활약하여 추종자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가 러시아 제국의 새 황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크게 2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그의 아내의 신분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폴란드 귀족 출신과 재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드르 1세가 제정했던 '귀천상혼'때문에 콘스탄틴 파블로비치는 황위 계승권의 자격을 잃었습니다. 귀천상혼은 간단하게 말하면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배우자와 결혼을 하면 불이익을 준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이유뿐 아니더라도 두 번째로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본인은 황위의 뜻이 없어서 알렉산드르 1세가 승하한 직후에 뜻이 없음을 알렸으며 새 황제 등극을 거부하던 니콜라이 1세를 설득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데카브리스트들은 옹립 대상자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의 의견은 생각하지도 않고 북방결사 조직이 이끄는 연대가 반란을 일으켰고  무장봉기이기는 했지만 전투를 치른 것은 아니며 무력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했습니다.

 

니콜라이 1세는 즉위식 날부터 피를 흘리는 것을 원치 않아 처음에는 그들과 교섭을 하기 위해 직접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교섭은 아무런 소득도 없었습니다. 당시 이를 주도했던 세르게이 투르베츠코이 공작이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군사를 동원해 진압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니콜라이 1세 명령에 전투가 발생했고 지도자가 없던 데카브리스트들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12월 혁명 그 이후

이 사건으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체포 되고 사살되거나 유배를 가게 됐습니다. 북방결사 뿐만 아니라 남방결사들도 체포되었고 통일슬라브 연맹도 체포되었고 이 사건으로 600여 명이 체포되었는데 주모자였던 젊은 장교들은 사살됐으며 니콜라이 1세는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시베리아 유배형을 보냈습니다.

 

니콜라이 1세는 황제 중심의 독재체제를 확립 시켰으며 데카브리스트에 의해 옹립될 뻔한 콘스탄틴 파블로비치는 처벌받지 않고 폴란드에서 총독직을 계속하다가 폴란드에서 사망했습니다.

 

시베리아로 유배되 이들은 10년 이상의 강제 노역을 했으며 사면을 받아 강제 노역에서 해당되었지만 유배지에서는 풀려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바이칼호 서쪽에 있는 이르쿠츠크에 정착하여 살았는데 이 당시 유배를 받은 귀족 중 기혼자가 18명 가까이 되었고 이들의 부인은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이주하여 살았습니다. 

 

이르쿠츠크는 데카브리스트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문화, 예술 등이 상당히 발전하였고 오늘날에는 시베리아의 파리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도시가 됐습니다. 그리고 12월의 혁명으로부터 100여년 뒤에 러시아 제국은 혁명으로 몰락하여 귀족들은 숙청을 당했습니다. 데카브리스트가 생각했던 대로 지배층이 먼저 개혁을 하지 않으면 피지배층이 들고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참조: 데카브리스트(두산백과) , 데카브리스트(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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