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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6일 임진왜란의 종전과 이순신

89년생몽실이 2022. 12. 15.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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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끝나고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영웅이 잠들었습니다.

1598년 12월 16일에는 약 7년 동안 이어졌던 임진왜란이 끝난 날입니다. 또한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任辰倭亂)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년) 5월 23일부터 1598년(선조 31년) 12월 16일까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입니다. 

임진년에 일본이 난을 일으켰다는 뜻으로 임진왜란으로 많이 알고 있으며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립니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라는 뜻으로 조일전쟁(朝日戰爭), 임진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임진전쟁(任辰戰爭), 도자기공을 일본으로 많이 납치하여 일본에 도자기 문화가 전파되어 도자기 전쟁(陶瓷器戰爭) 등입니다.

 

 약 7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조선은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소실 됐고 인구는 최소 100만 명 이상이 감소했으며 경작지의 2/3 이상이 황폐화되는 등의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광해군이 즉위하여 북인 정권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경우 청나라로 교체되는데 영향을 끼쳤으며 일본의 경우 도요토미 정권이 오랜 전쟁으로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여 붕괴하고 에도 막부가 수립되는 등 16세~17세기 동아시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노량해전(露梁海戰)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을 마무리 짓는 큰 전투이자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입니다. 

노량해전 이전에 일본군은 행주산성의 패배와 수군의 잇다른 패배 그리고 명나라가 참전하는 것에 전세가 불리해지자 명나라에 휴전을 제의하였으나 결렬이 되면서 1597년 15만 대군을 동원하여 다시 침략하는 정유재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고 명량대첩에서 일본의 수군을 격파하고 명나라 수군도 합세하면서 남부의 해상권이 다시 조선과 명나라 연합수군에 넘어가게 되면서 연이은 패배로 병사들의 사기는 땅을 쳤고 해상로 보급은 차단당하여 군수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혹독하고 최악의 겨울을 보내야 하는 상황에서 일본의 정권을 잡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 소식에 일본군은 철군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철군하는 일본군의 퇴로를 막을 생각이었습니다. 이대로 보내줬다가는 전력을 보강하여 다시 재침략을 할 수도 있기에 퇴로를 막고 적을 섬멸하여 작은 불씨도 남기려 하지 않지 않았습니다. 

 

1598년(선조 31년) 12월 16일 이순신을 포함한 조선과 명나라 연합수군이 경상우도 남해현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조선은 일본군을 섬멸할 기세였고 일본군은 어떻게서든지 뚫고 철수하려 했습니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의 전선 400여 척이 격파당했고 남해 방면으로 도망쳤는데 조선 수군은 이를 필사로 추격하여 추가로 전선 50여 척을 격파였고 일본군은 남은 50여 척의 배를 수습하여 도망쳤습니다. 당시 조선이 큰 격차로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목표였던 장수들을 몰살하는 것은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일본군 구원 병력과 연합수군이 싸우는 틈을 이용하여 장수들은 일본으로 철수했습니다.

 

 

 

불멸의 이순신

1545년 4월 28일 ~ 1598년 12월 16일, 16세기 조선 중기의 무신입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이며 시호는 충무(忠武)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을 통솔했으며 조선시대 장군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구국의 영웅이자 세종대왕과 더불어 최고의 위인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1576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뛰어난 지도력과 지락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전술로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엄청나게 승리를 하여 영웅을 넘어 나라를 구한 성웅으로 추앙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정은 파가 나뉜 붕당으로 갈라져 있었으며 조정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요시라라는 인물이 가토 기요마사가 다시 조선을 침략할 거라는 내용을 조정에 전달하였고 이를 믿은 조정에서는 권율을 통해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순신은 일본군의 계략에 빠질 것을 우려하여 출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이순신을 여러 차례 탄핵하였던 조정의 대신들은 이를 문제 삼았고 그 책임으로 파직되어 한양에 압송되어 한 달 가까이 투옥되고 문초를 받은 뒤 백의종군을 하게 됩니다.

 

이순신을 이어서 삼도수군통제사가 됐던 원균은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에서 대패하고 전사하면서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됐습니다. 이후 남은 전선을 수습하고 수군을 개편하는 등 조선의 수군을 재건한 이순신은 진도 울돌목에서 그 유명한 명량해전(鳴梁海戰)을 치르게 됩니다. 13척의 배로 130여 척의 일본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면서 전세를 뒤집었습니다.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는 노량해전(露梁海戰)입니다. 1598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 하자 철군을 준비하게 된 일본군을 이순신은 순순히 보내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퇴로를 막아 섬멸할 계획을 세운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과 연합하여 일본의 전선을 격파하였고 이에 남해로 도망을 가던 일본 수군을 추격하던 중에 유탄에 맞아 전사하게 됩니다. 

 

조선왕조 실록에서는 당시 이순신이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는 말을 마친 뒤에 숨이 끊어졌다 기록했으며 이순신의 조카 이완이 이순신의 유지대로 죽음을 숨긴 채 전투를 독려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의 나이 향년 54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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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후에서야 알려졌는데 통곡이 바다를 덮었다고 합니다. 죽음 이후 이순신은 1643년(인조 21년)에 시호인 '충무(忠武)'를 받게 되었고 1659년(효종 10년)에는 남해의 전적지에 이순신의 비석이 세워졌으며 1707년(숙종 33년)에는 충청도 아산에 세워진 이순신의 사당에 '현충(顯忠)'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1793년(정조 17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됐습니다.

 

이순신이 남긴 것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임진왜란 당시 작성한 난중일기(亂中日記) 일 것입니다. 난중일기는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지정 명칭은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任辰將草)>>입니다.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으며 명나라 신종이 이순신에게 준 8종 15개의 유물들인 통영의 유물 등은 보물로 지정됐습니다.

 

지금은 광화문 광장에 동상으로 세워져 있으며 각종 드라마, 영화, 책 등으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여담

이순신은 임진왜란 때 그 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포격 위주의 전술을 구하였습니다. 이런 이순신에게 감복한 인물이 있었으니 명나라 수군 도독인 진린이었습니다. 그는 능력은 있으나 탐욕스러운 인물로 걸핏하면 조선 사람을 깔보기 일쑤였으나 이순신에게는 감복했습니다. 그가 이순신을 보며 "경천위지(經天緯地:천하를 다스리고 국정을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의 재주와 보천욕일(補天浴日: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다는 뜻으로 매우 큰 공적)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라는 찬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자신보다 2살이나 어린 이순신에게 '노야(老爺)'라는 존칭으로 불렀으며 자신이 탄 가마가 이순신이 탄 가마보다 먼저 나가는 일이 없을 정도로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또 그는 이순신에게 함께 명나라로 가서 살자고 하기도 했습니다. 

진린은 이순신과 함께 노량해전에 참전했었는데 전투가 끝난 뒤 이순신의 죽음을 전해 듣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일본군에게 둘러 쌓여 있던 자신을 구한 노야께서 어찌 돌아가셨나며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명나라 만력제는 이순신의 공을 높이 사서 이순신 생전에 명나라 정 1품 대명수군도독(大明水軍都督)을 제수했습니다. 명나라 품계에는 수군에는 도독(정 1품)이 없고 제독(종 1품)만 있었는데 정 1품의 수군 도독이라는 명예직을 제수했습니다.

 

이순신의 후손들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무반 가문으로 무과 급제가 무려 267명이나 됐습니다. 이순신의 조상이 성균관 대제학을 역임하거나 병조참의로 재직하며 세자의 스승 노릇을 했던 전통적인 문반 가문이었던 게 반하여 이순신을 기점으로 무반 가문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이순신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진로 선택을 강요받은 것은 아닌가 싶은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데 무과의 급제한 이순신의 후손들은 후에 실록에 기록될 때 이순신과 종종 비교를 당하고는 했다고 합니다. 근대에 들어서는 독립유공자를 여럿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이순신이 주인공인 드라마 중 유명한 드라마는 단연 KBS의 불멸의 이순신입니다. 2004년에 방영되어 총 104부작으로 김명민 배우가 이순신 역을 맡았습니다. 드라마라 역사적 고증이 안된 부분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순신이 승리를 거둔 전투입니다. 많은 이들이 23전 23승으로 알고 있지만 이순신의 참전사가 담긴 난중일기에도 23전이라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해군사관학교 제장명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이순신이 참전한 전쟁은 총 45번이며 난중일기와 선조실록 등 여러 자료를 조사한 결과 제장명 교수는 이순신의 전적을 45전 40승 5무라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드라마가 축소한 것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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