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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 값 때문에 벌어진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

89년생몽실이 2022. 12. 16.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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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3년 12월 16일 미국 매사추세츠의 밤에 일어난 일입니다.

1773년 12월 16일 밤 미국 식민지의 주민들이 영국으로부터 차(茶) 수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일으켰던 사건입니다.


영국에 대한 반발

1755년에 시작하여 1763년에 끝난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인 7년 전쟁이 영국으로 승리로 끝이 나면서 영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영국은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되었고 영국 정부는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764년부터 여러 가지 과세를 부과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는 1764년 설탕세, 1765년 인지세가 있었고 이를 부담해야 했던 미국 식민지인들은 대거 반발하여 대규모 폭력 사태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영국은 1766년 이를 철회했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미국 식민지에 대한 영국 정부에 대한 민심은 더욱더 흉악해졌습니다. 1770년 2월 22일에는 크리스토퍼 세이더라는 미성년자가 세관 직원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같은 해 3월에는 영국 육군 병력과 주둔지 앞에 모여 있던 시민과의 갈등이 발단이 되어 무력 충돌일 일어나 위협을 느낀 육군 병사들이 장교의 명령 없이 머스킷 소총으로 시민 5명을 죽이고 6명에게 부상을 입힌 유혈사태를 만들어 냈고

그야말로 미국 식민지는 영국에 대한 불만이 커질대로 커져 있었습니다.

 

 

홍차법

영국 정부는 식민지인의 반발을 무릅쓰고 세금을 부과했지만 빚이 워낙 많아서 감당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영국의 경제의 한 축이었던 동인도 회사들이 인도에 있었던 흉작의 피해로 유럽 시장에서 경쟁력을 상실하며 파산 직전인 상태였습니다. 이에 영국 정부는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새로운 차 조례를 제정하게 되었는데 이 것이 '홍차법'입니다.

 

홍차법이 제정된 배경을 알려면 당시 홍차가 어떤 루트로 유럽에 돌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홍차는 중국에서 네덜란드로 갔고 네덜란드에서 영국 및 영국 식민지로 유통하는 구조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자국으로 수입되는 홍차에 대해서 관세를 부과했으며 네덜란드에는 부과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네덜란드를 통해서 식민지 밀수업자들은 네덜란드에서 홍차를 사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인도의 흉작으로 인하여 어려운 상황에서 유럽의 차 무역을 통해 본국의 세금 징수를 부담하면서 네덜란드와도 경쟁을 해야 했습니다. 

 

동인도 회사가 파산을 한다면 주주들은 물론 은행과 영국 정부가 큰 손해를 입을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영국 정부는 판매하지 못해 남은 차를 미국 식민지에서 팔 수 있도록 동인도 회사에 독점권을 주게 됐습니다. 그에 아메리카에서 차에 대한 밀수가 금지되고 식민지 밀수업자와 상인들을 통해서 차를 구할 수 없게 됐습니다.

 

미국 식민지인들에게 전혀 문제 될 게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 제도는 더 좋았습니다. 격분한 것은 차를 소비하는 귀족들이 아닌 이제까지 차를 밀수해 온 밀수업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차가 워낙에 비싸서 중산층이나 귀족들이 마셨고 일반 시민들은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비싼 차를 저렴한 가격에 마실 수 있어서 오히려 일부에서는 이 법을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차를 밀수 했던 밀수업자들은 달랐습니다. 네덜란드로부터 밀수가 금지가 되다는 것은 여태 세금을 내지 않고 부를 축적 했던 이들에게는 생계 수단이 끊어지는 것과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렇다보니 분노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홍차법은 중국에서 동인도 회사가 수입하여 영국과 영국 식민지로 유통하는 직접적인 구조 때문에 거품이 빠져서 오히려 미국 식민지인들은 기존의 홍차 가격의 절반으로 차를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밀수업자들은 당연히 반발하였고 이에 영국 정부에게 이전부터 불만을 품고 있었던 미국 식민지의 지식인들이 동조하면서 커지게 된 것입니다. 미국 식민지의 지식인들은 식민지 의회가 있음에도 설탕세부터 영국 정부에서 독단적으로 세수 법안을 제정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들의 무시하고 자신들의 자치력에 도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773년 12월 16일 밤 찻주전자가 된 보스턴 항구

1773년 11월 5일, 아메리카에서 차를 판매한 독점권이 동인도 회사에 부여되었고 차를 실은 동인도 회사의 배가 같은 해 11월 28일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이에 식민지인들은 불매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차를 소비하는 귀족들은 시행된 법에 불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급진파 세력들은 차를 산 사람들을 찾아 협박하는 등 자발적이던 강제적이던 불매운동을 지속했습니다 그 결과, 동인도 회사 대리점이 문을 닫고 영국으로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이에 영국 정부는 불매 운동에 대해 강력하게 맞섰습니다. 다시 보스턴 항구에 차를 실은 배가 들어왔는데 이때는 영국 군함이 호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1773년 12월 보스턴의 시민들은 배를 영국으로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1773년 12월 16일 밤 미국 매사추세츠 보스턴 항구에 대규모 항의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 가운데 존 로우라는 사람은 '차가 소금물에 섞이면 어떻게 될지 아는 이 있소?'라고 물었고 미리 대답을 맞췄던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분장을 한 100 여 명이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보스턴 항구는 오늘 밤 찻주전자다!' 그리고 이들은 차가 잔뜩 실려 있는 동인도 회사의 무역선을 노렸습니다. 이들은 총 3개의 무리로 나뉘어 3척의 배에 올라탔고 배의 선장과 선원들을 협박하여 화물칸 열쇠를 빼앗습니다. 화물칸에 쌓여 있던 342개의 나무 상자들이 박살이 나고 안에 있던 차들이 모두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당시 한화로 약 16억 원이라는 가치가 있던 차가 바다에 흩어졌고 밤 9시 보스턴 항구에는 찻잎이 넘실거렸습니다.

 

이 사건으로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후 이 사건은 미국 식민지 전역으로 퍼졌으며 영국에 대한 저항심을 불어넣으면서 영국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이들이 일어났습니다. 이와 유사한 티 파티 사건들이 벌어졌습니다. 

 

 

사건 그 후

사건을 접한 영국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는 미국 식민지 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주요 인사라고 할 수 있는 조지 워싱턴, 벤자민 프랭클린도 이는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영국과 동인도 회사가 입은 손해가 실로 어마어마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벤자민 프랭클린은 영국 측에 입은 손실을 메꿔주고자 했습니다.  그는 성금 모음을 통해 11억 원가량 모았고 이를 영국 수상에게 가져갔으나 오히려 거절당했습니다.

 

분노한 영국 정부는 다른 식민지에 대한 경고로 보스턴을 가혹하게 응징했습니다. 1774년 3월 보스턴 항구법을 제정하여 보스턴 주민들에게 피해 보상에 대해 요구하였고 이를 이행할 때까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여 모든 배들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습니다. 또한 기존의 자치권을 인정해주던 통치 방식에서 영국 정부에 의한 직접 통치로 지배 방향을 바꿨습니다.

 

항구를 폐쇄하면서 매사추세츠 자치 정부를 강제로 해산하였고 식민지 상원 의원을 영국의 왕이 임명하도록 바꿨으며 읍민 회의는 지사가 요구할 때만 소집할 수 있게 하였고 재판 운영법, 군인과 관리에 대한 재판은 다른 식민지나 영국 본토에서 열도록 했습니다. 또 군인 민박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필요한 경우 언제든지 군인을 개인 집에 숙박시킬 수 있도록 하는 법이었습니다. 

 

식민지인 내에서도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누어져 있던 상황에서 영국의 강경한 대응에 온건파들도 급진파에 동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식민지인들의 반발만 더 불러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775년 미국의 독립전쟁이 발발로 이어지면서 보스턴 차 사건은 미국 독립전쟁의 발단이 됩니다.

 

 

여담

보스턴 차 사건과 관련하여 유명한 설 중 하나는 보스턴 차 사건의 영향으로 미국에서 '우리는 영국 놈들이 마시는 차는 마시지 않겠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겠다."라며 홍차 대신 커피를 선호하는 국가가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사실 미국에서 홍차를 마시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유독 커피를 더 많이 마시는 것에는 커피값이 더 싸고 미국과 거리가 가까운 쿠바, 브라질에서 대량 재배 되어 저렴한 운송비로 구하기 쉬웠기 때문에 커피를 더 많이 마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건에 대해서 배울 때 영국 정부에 대해 억압을 견디지 못한 미국 식민지인들이 봉기를 하였다고 배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는 밀수업과 관련된 자들이 생계의 위협을 받아 일으킨 사건입니다. 차 값을 더 싸게 만들었다고 일어난 일이 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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